이전에 다룬 것은 유저의 분신인 아바타가 유저에게 좀 더 애착심을 갖게 하고, 유저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클래스라는 이름으로 제한을 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혹시 그렇게 읽히지 않았다면 전적으로 필자의 필력이 잘못된 것이니 이해해주기 바란다. 제대로 읽힐 수 있게 차차 수정해 나가도록 하겠다.)
어쨌든, 무언가를 해 나감에 있어 제한이 없어진 '나의' 아바타는 MMORPG의 세계에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 '성장'은 크게 다음의 네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첫째, '캐릭터의 외형이 변화하 것'
둘째, '캐릭터가 익히고 있는 스킬의 숫자의 증가, 스킬의 레벨의 상승'
셋째, '캐릭터의 스테이터스의 변화'
넷째, '게임 내 세계관에서 아바타의 위상의 변화'
이 네 가지의 성장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캐릭터의 성장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네 번째의 성장은 단순히 성장이라 쓰기엔 미묘한 감이 있긴 한데, 그것은 추후에 서술하도록 하겠다.
2-1. 캐릭터의 외형 변화
개인적으로 '마비노기'라는 게임에서 보여주는 캐릭터 메이킹과 그 이후의 변화를 제일 좋아하는 편이다. 캐릭터가 '나이'를 먹어서 키가 변하고, '음식을 섭취'해서 체형이 변하는 것이다. 물론 오래된 게임이다보니 캐릭터의 형태가 변화한다고 해서 그 변화의 폭이 크게 체감되는 일은 없긴 하다.
제일 이상적인 것은 '마른 캐릭터는 재빠르지만 힘이 약하고, 뚱뚱한 캐릭터는 힘은 강하지만 속도가 느리고, 키가 큰 캐릭터는 키가 작은 캐릭터보다 리치가 더 길다' 같은 식의, 체형의 변화에 따른 캐릭터의 특성이 함께 변화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적용시키기엔 문제가 따른다. 현실에서 보면 예시로 든 공식이 반드시 맞는 것도 아닐 뿐더러, 불이익을 회피하기 위해 모두들 중간적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한, 가상 현실에서도 다이어트를 해야한다는, 또 하나의 스트레스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자연히, 독특한 외모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또 하나의 몰개성의 요소로 작용할 것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캐릭터의 외형의 변화는, 아쉽긴 하지만 일정한 시기마다 유저들에게 외모의 재선택권을 주거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저가 원하는 외모로 변하도록 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나을 것이라 본다.
누구는 뭐 누구는 뭐... 심지어 각 직업마다의 캐릭터 이름에 성별, 심지어는 성격까지 붙어있다. 실제 게임 중에 그러한 성격이 나올 일이 하나도 없는데.(자연을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선량한 캐릭터로 몹들을 갈아버리는 플레이를 하도록 하는 것에서 무슨 갭 모에라도 느껴라는건가?)
아바타는 유저의 선택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자신이 키운 방향에 대한 결과가 레벨 하나로만 끝나버리는 것보단, 훨씬 자유로운 성장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제작자가 해야할 일은 그러한 선택들의 누적이 가져올 수 있는 변화를 체감 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일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도, 나는 아바타를 클래스 라는 이름으로 제한하는 것을 지양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아바타 하나를 만능으로 만드는 것 역시도 지양하고자 한다. 혼자하는 게임을 하는 것은 싱글 플레이로 족하지 않나 싶기도 할 뿐더러, '마비노기'라는 게임에서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괴물' 캐릭터들의 숫자가 늘어감에 따라 벌어지는 밸런스 붕괴의 폐해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으니 이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다양한 클래스의 캐릭터들을 동시에 사용 가능하도록 하는 것도 역시 지양한다. 유저가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며 애착을 갖고 접하기에는 역시 1개의 캐릭터가 나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MCC라는 시스템을 통해 3개의 캐릭터를 동시에 운용할 수 있도록 한 그라나도 에스파다를 해 봤었는데 그곳의 캐릭터들은 어디까지나 유저가 다루는 유닛이지 자신만의 분신이라고 여기기엔 타 유저와의 차별성 면에서 너무나 몰개성했고, 세 개의 캐릭터로 분산되다보니 세밀하고 다양한 조작을 시킬 수 없었으며,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부품에 불과하게 여겨지는 면이 있었다.
즉, 유저에게 단 1 명의 아바타를 만들 수 있도록 하되, 그 아바타에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그 가능성은 유저의 선택과 행동이 누적된 결과로서의 '성장'이자 '완성'이 되도록 함이 제일 바람직하다 하겠다.
온라인 게임 회사에서 내거는 시놉시스니 세계관 설명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정말 쓸모 없다고 본다. 이것들을 과연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보는가? 그리고, 그것들이 정말 지켜지면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도입부에서 ~~했었다. 라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막연하게 이러한 세계관이 있다고 해 놓고, 그것이 끝이다. 그 다음에 게임 내에서 지속적으로 언급 되는 것이 있던가? 적어도 내 기억에 그러한 것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경우는 별로 본 적이 없다.
심한 경우에는 적대하는 이들간에도 스타트 라인이 같다...
오히려 세계관이라는 이름의, 이곳에서 통용되는 시스템에 더 치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다.
내 소설 중 어떠한 것으로 만들어지더라도, 공통되는 시스템적 특성들이 몇 가지 있다. 이 페이지에는 그러한 것들을 하나씩 써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올해는 지난 4년 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이 사건이! 반드시 여러분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고, 분명한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낫슈는 왼손으로 턱을 괸 채로 몇 번째인지 모를 긴 하품을 털어내었다.
“혹자는 어째서 군을 동원하여 일거에 제압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혹자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조사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가 사태를 해결할 마음이 없이 현 상태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비난합니다!
하오나 저는! 저희 스프키리스 시는! 진정한 민주 시민 사회 형성을 지향하고 있기에 군대라는 강압적인 무력 사용을 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전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인권을 무시하는 조사 역시 행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다면 범인을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효율성만으로 봤을 땐 분명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시 메데인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에 군대라는 비민주적 무력 집단이, 인권을 무시하는 경찰력의 행사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며 민주주의를 더럽히는 저열한 행동을 도모할지도 모른다는 저의 진심어린 우려 때문입니다. 또한……”
평소 어떤 일을 하게 되든 그 일에 언제나 ‘필요’라는 조건을 신경 쓰는 편이었지만, 정작 단 한 번도 그 필요 때문에 상대를 겨누었던 적은 없었다. 그것이 단 한 번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시켜줄 수 있으리라 여겼던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도 정당화 시켜주지 못했던 상황들이 너무 많았을 뿐더러 자기 자신조차도 그 필요와 정당성에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련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방관하며, 낫슈 피아네른은 스프키리스 시장의 장황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러나 나름대로 더없이 열성적일 연설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시장의 연설 중, 특별히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의 30% 이상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고, 나머지 60%는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나머지 10%는 전에 했던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함해서 수십 명이 언제 끝날지 모를 시장의 연설 아닌 연설을 들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는 그가 스폰서였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실질적으로 필요한 이야기일 듯한 것이 시작되는 것이 시장의 연설 직후라고, 앉으면서 받았던 안내장에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이런 과정도 필요라고 한다면 필요겠지…….’
‘결국은 필요 따윈 신경 쓰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하는 머릿속에 떠오른 의구심에 궁색한 설득을 뇌까렸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앞쪽에서 누군가의 혀를 차는 소리와 그에 동조하는 낮은 코웃음 소리가 듬성듬성 이어졌다. 시각을 확인해보니 시장이 단상에 선지 30분 정도 지나있었다. 단순히 잡음으로 무시하고 있기에는, 시간이 조금 많이 흘러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이 교실에 모여 있는 사냥꾼의 숫자는 대략 50여명 정도. 메데인 공화국 출신은 물론이고, 이 업계에서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얼굴만 보더라도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도 몇 정도 앉아 있었다.
여기 있는 사냥꾼과 그들을 보조해줄 일행까지 합친다면 어림잡아 200여명 정도가 이 도시에 들어왔을 것이다.
이만한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이 도시로 들어올 수 있었으면서도 기자들의 촉각을 피할 수 있었던 점이라든가, 시청에 있는 회의실 대신 굳이 시립 대학의 강의실 하나를 이용하여 수업 중의 하나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또한 실무 관계자들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었던 일인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으련만……
“그러나!!”
“저게 지금 몇 번째 그러나 일까?”
“열 네 번째.”
다시금 말을 잇고자하는 시장의 목소리에서만큼은, 일단은 이 일의 주최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는 것이 무색하다 싶을 정도로 그러한 사실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것에 의아함과 의문을 느끼며 낫슈는 의례 행사라면 하나쯤은 있을 법한 현수막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살풍경한 실내를 훑었다.
“저 인간은 지치지도 않나.”
“벌써 45분 째야.”
“분위기를 모르는군. 무신경도 저 정도면 예술이지.”
“저기, 저 시장 놈 비서의 얼굴색은 진작 색이 갔구먼.”
“여기가 선거 유세장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누가 나가서 저것 좀 말려봐.”
“우리한테 열을 올려봤자 우리가 저 양반에게 던져줄 표는 없는데 말이지.”
낫슈의 눈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교탁 아래의 파이프 의자에 널브러지듯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지나치게 길어진 시장의 연설에 지쳐있었다. 혼잣말처럼 내뱉은 제각각의 불평들이 자연스럽게 대화로 이어졌고, 그것은 곧 웅성거림이 되어 끝맺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시장의 연설을 묻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러분께서 저희의 이런 노력을 부디 잊지 말아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스프키리스 시와 저의 결단은 먼 훗날 저희 메데인 공화국의 민주 시민 사회 형성에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 남아있지 않은 소란 속에서도 시장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단상 바로 앞줄에서까지 노골적인 야유가 직설적으로 불구하고 시장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하고자 한 말은 끝까지 다 하고 가겠다는 건가? 대단한 집념이구먼.”
“누가 적어준거 보면서 읽고 있자니 별 수 있어? 어디서 끊어야 할지 모르는 거겠지.”
“자자, 조용히 해 주십시오!”
“시장님께서 이야기하고 계시는 중이십니다!”
상황을 보다 못한 안내원들이 소란을 진정시키고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소란을 더욱 부추겨 교사가 없는 자습 시간의 교실마냥 소음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현상금이 얼마라고 했지?”
“초청장에 나와 있지 않았었나? 2억 4천만인가 할 걸, 누구 초청장 가지고 있나?”
“세금 빼고 실제로 받을 수 있는 상금은 그보다 적을걸? 혹시 이 나라의 세율을 아는 사람 있나?”
“흐음, 글쎄? 이 나라는 세금이 꽤 쎈 편이라던데…… 그래도 한 1억 9천 정도는 받지 않을까?”
“또 모르지. 이 나라에서는 외국인에게도 소득세 이외에 추가로 더 받던가?”
“외국인 특별 소득세였던가……? 아마 그런 조항이 있는 걸로 아는데…….”
소란을 잠재우려는 듯, 자신의 연설에 스스로 고조되어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시장과 그에 아랑곳 않고 자신들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사람들, 그리고 소란스러워지는 분위기를 진정시키고자 목소리를 높이는 안내원들 사이에서 더욱 혼란을 더해가는 분위기……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시장 비서의 표정에 낫슈는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 참, 이래서야 원…… 완전히 개판이군.”
이런 식으로 상황이 계속 된다면 제대로 된 이야기가 시작되려면 앞으로 한 시간 정도는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낫슈는 의자 옆에 놓아두었던 가방에서 식이 시작하기 전에 받아두었던 소책자를 꺼내들었다.
“정신 장애에 의한 흡혈 충동……이라.”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투박한 표지를 넘긴 낫슈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를 연상 시킬 만큼 선명한 붉은 잉크가 지나간 첫줄의 문장이었다. 대부분의 국가의 규정이 그렇듯 이 메데인 공화국의 인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
‘뮤 아네스에 존재하는 모든 지성체는 이네스(인간)임을 기본으로 하며, 그 외의 어떠한 종도 지성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라는, 자못 오만함마저 느껴지는 선언과도 같은 문장이 낫슈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외형도, 정신 구조도, 도덕도, 윤리도, 자아 정체성도…… 그 어느 것도 이네스임을 규정하는 필요조건은 아니었다.. 지성체이기에 이네스이며, 그렇기에 기준이 되는 이네스에서 벗어난 부류는 그 기준이 되는 이네스의 손으로 배제한다는, 절대불변에 가까운 원리원칙을 낫슈는 다시금 상기했다.
그랬다.
그가 사냥해야 할 목표는 기준에서 이탈한 비정상적 존재, 어디까지나 이네스로서 정신 장애에 의한 흡혈 충동을 가진, 이네스의 손으로 배제해야할 또 다른 이네스일 뿐이었다.
법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암묵적으로는 인정하다 못해 배제하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었다. 윤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역시 문제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당사자 주변의 극히 소수만이 반감을 느낄 뿐인 집단의 광기였다.
이러한 감정들 속에서, 자신과 같은 그러나 다른 존재. 그러한 누군가를 겨눌 수 있을 그 어떤 이유보다도 가장 합리적인 이유가 들러붙은 상황이 준비되었음이 느껴졌다.
“흠.”
짧은 비음과 함께 소책자를 덮으며 낫슈는 팔짱을 꼈다. 결정이 끝나는 순간 필요라는 조건의 끄트머리가 손가락 끝에 닿았다. 굳이 그것을 끄집어낼 필요도 없을 만큼 가까이에서, 그것의 고동이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는 것을 애써 지워버리며 낫슈는 입술 끝을 살짝 깨물었다.
“여기, 먼저 계약서를 받아볼 수 있을까?”
셔츠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며 낫슈는 때마침 그의 옆을 지나쳐가던 스프키리스 시청의 배지를 단 사내를 불렀다. 초조함과 원망이 담긴 시선을 줄곧 시장 쪽으로 두고서 걸음을 옮기던 정장차림의 사내는 옆에서 들려온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다리를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낫슈를 바라보았다.
“?”
문득,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사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펜을 흔든 낫슈는 어딘지 모르게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눈매를 좁혔다.
햇살을 마주하는 날이 적어보이는 하얀 얼굴에 새까만 머리칼을 단정하게 자른 평범한 사내였다. 왼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자신에게 건네는 그 손의 검지에는 필기구를 많이 들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굳은살이 뚜렷했다. 더없이 평범한, 그저 단순한 관계자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이 사내에게 피의 향기와 같은, 일상을 일탈한 위화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왜일까?
“어줍지 않은 감각 타령이라도 하고 싶어 하고 싶은 건가……”
스스로의 망상이 지나친 것이라고 자조하며 낫슈는 시선을 내려 받아든 계약서를 향했다. 사내는 그에게서 벗어나 앞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를 혹시나 하는 미심쩍음으로 살피던 낫슈는 고개를 휘젓는 것으로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성의 호소 하에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아울러……”
의미라고는 훨씬 전부터 상실한 채 고장 난 라디오처럼 소음 같은 이야기를 이어가던 시장의 연설은 끝끝내 견디지 못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생기고서도 계속 되었다.
막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던 윤진은 베란다 쪽에서 들려온 주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뿌옇게 성에가 낀 베란다의 유리창에 빗방울이 부딪치는 것과 그렇게 부서져 흩어졌던 물방울들이 다시 뭉쳐 아래를 향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레, 갑자기 무슨 비래? 모처럼의 휴일에……”
윤진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별 수 없이 오늘도 실내에 틀어 박혀야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우울함이 질척하게 묻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Gloomy Sunday?”
아까와 다르지 않은 크기의 목소리로 주현이 질문해왔다. 그는 베란다 쪽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시야에선 보이지 않았다.
“Rainy day 쪽이 그나마 더 밝은 느낌이 들지 않아요?”
“그런 거야?”
“굳이 고르자면 말이지요. 음… 하긴 뭐, 맑았다고 해도 그다지 달라질 건 없긴 하겠네요. 어차피 월급 전이라 돈도 없고….”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손을 바지에 슥 문지르고 그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쑥 하고 들어가 버리는 탄력 없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돈도 없고 날씨도 구질구질하고… 손끝에 닿는 텔레비전 리모컨 정도가 이 휴일에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이라는 생각이 들자 의도하지 않은 한숨이 한 번 더 쏟아졌다.
“주현씨! 오늘 뭐 재미있는 거라도 한다고 했던가요?”
윤진은 여전히 베란다에 있을 주현을 향해 물으며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대답은 그녀의 목소리가 아닌 툭툭거리는 빗소리뿐이었다. 못들은 건지 아니면 그냥 대답을 하지 않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버튼 몇 번 눌러보면 될 일이다 싶어서 그는 재차 질문하는 대신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
팟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브라운관 위로 빛이 뿌려졌다. 이름도 모르는 일요 아침 드라마가, 어색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왠 아주머니가, 부저를 누르고 뭐라고 말하고 있는 교복 차림의 소년의 모습이, 쇼핑호스트가 흔해빠진 물건 하나를 들고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그의 손에 들린 리모컨의 버튼이 눌릴 때마다 차례로 나타났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에잇, 뭐야 이게!”
텔레비전을 켰을 때 보았던 채널의 번호가 우측 상단에 다시금 나타나자 윤진은 혀를 차고는 리모컨의 빨간색 버튼을 눌렀다. 켜면서 들었던 소리와 마찬가지의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의 화면은 다시금 시커멓게 변했다.
“아아, 하나 같이 재미없는 것들만 하고 있네…….”
“이봐, 윤진!”
중얼거리며 소파 위에서 뒹굴 거리던 윤진은 주현의 목소리에 소파의 등받이에 파묻었던 얼굴을 돌렸다. 유리로 된 미닫이 문 바깥으로 주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부스스한 검은 머리칼에 잠옷 대용으로 입고 있는 주름투성이의 흰색 원피스 차림의, 어딘지 어수선해 보이는 모습이.
“옷이라도 제대로 입고 있지 그래요. 근데, 왜요?”
“비가 오고 있어.”
“네에, 저도 알아요. 아까도 말씀하셨잖아요.”
“……으음.”
윤진이 새삼스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로 반문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주현은 뺨 언저리에 불만을 그렸다. 그리곤 거실로 들어와 그가 드러누운 소파 바로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깥에 나가기도 그렇고, 텔레비전이나 보자.”
“제가 아까도 말했던 걸…… 그리고, 날씨가 좋지 않아서 안나가는 거 아니에요. 월급날까진 돈이 아슬아슬해서 안나가는 거지.”
“리모컨.”
“자요, 여기.”
자신의 말을 무시하며 손을 펼치는 그녀에게 윤진은 반쯤 체념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에게 리모컨을 건넸다. 그녀는 아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눌렀다.
“근데 말야, 윤진아.”
“네에.”
“돈 벌어오는 건 너 맞지?”
“그렇죠. 더불어 가계 담당도 저죠.”
“그럼 돈이 부족하단 말은 네가 잘못했다는 말이지?”
“윽! 그,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나야 더부살이 하는 처지니까…… 말하기 뭐하긴 한데 말야.”
“그럼 안 해주셔도 되는데.”
평소에 멍하니 있는 그녀지만, 가끔씩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던지는 것이 그녀의 특기라면 특기였다. 그때마다 찔렸던 부분들에 지금도 후유증이 남아있음을 떠올리며 그는 거절을 말했다. 그러나 거절했다고 해서 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에, 그는 나름 각오를 다졌다.
“누구 말마따나, 안나가는 거나 못나가는 거나 그게 그거지 뭐. 제대로 돈 관리 못하고 있다고 말하면…… 결국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 너 무능력하다고 말하는 것 밖에 더 돼?”
“뭐,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말이죠. 그래도 그렇지……”
입맛을 다시는 혀끝이 쓰다는 것을 느끼며 윤진은 말을 얼버무렸다. 화면이 계속해서 바뀌다 텔레비전을 켰을 때의 채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 텔레비전은 소리를 없애고 새까만 얼굴로 돌아갔다.
허공으로 떠올랐던 리모컨이 자신의 배 위로 떨어지는 것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윤진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하나 같이 재미없는 것들만 하고 있네…….”
“그거 아까 제가 했던 말인데.”
“꼭 윤진이같은 말하지 마. 속 좁아 보인다.”
“주현씨!?”
아무렇지도 않게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하는 주현에게 항의의 표시를 했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들어 휘휘 흔들었다. 뭐, 그녀가 그렇게 손을 흔들면, 이상하게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윤진은 한 번의 한숨을 더 내쉬었다.
“……”
“……”
주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윤진 역시 입울 다물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빗줄기가 굵어지는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성에가 더욱 짙어져 밖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비가 오는 날은, 윤진에게 기분 좋은 날은 아니었다. 그녀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그의 머릿속은 분명 Gloomy Sunday라는 노래의 가사마냥 우울함 속에 푹 젖어 있었을 것이었다.
첫 사랑의 그녀와 헤어졌을 때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신당했을 때도, 그를 인정해 주었던 스승이 죽었던 날도, 그리고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었던 날에도……
“저기, 혹시…… 너 알아?”
“응? 뭘요?”
문득, 불쑥 질문해오는 주현의 목소리에 윤진은 상념에서 깨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공을 더듬는 듯한 눈을 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서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같은 향기가 느껴져 윤진은 그녀가 다음 말을 하길 기다렸다.
“온실의 화초가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죽는 이유 말야.”
“헤에, 화초가 밖으로 나가면 죽나요? 꼭 그렇지만도 않지 않나?”
“죽어.”
자신의 반문을 일축하는 그녀의 짧은 한 마디에 윤진은 그 이상 반문하지 않았다. 단순히 식물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온실의 화초’라는 표현이 세상의 더러움을 모른 채 보호받는 사람을 말하는 것 역시 포함된다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온실의 화초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음, 모르겠어요.”
“깊게 생각할 건 없어.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하라는 거니까.”
“역시 잘 모르겠네요. 뭐랄까…… 막연하기도 하고요.”
“그럴까?”
“그런 것 같아요. 시간 나는 대로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응, 그래.”
차분하게 대답하고, 그녀는 다시금 텔레비전의 리모컨을 들었다. 꺼져버린 텔레비전을 쳐다보며, 그녀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저기, 근데 주현씨는 그 답 알고 있어요?”
“나름대로라면.”
“헤에,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네가 생각하는 답을 내게 말해줄 때, 말해줄게.”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주현은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 몇 번 채널을 돌리더니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을 찾은 건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일요일 아침에 할 만한 평범한 가족 드라마였다.
달리 할 일이 없어 윤진 역시 그 프로그램에 시선을 두었다. 경험해보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인지라 한없이 거리감이 느껴지는 드라마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침묵했다. 주현은 물론, 그의 그런 점을 모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 보이는 그 눈은, 꼭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끝을 자극하는 지독한 비린내에 베휜은 눈살을 찌푸렸다. 역겨운…… 그리고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의 섬뜩한 향기가 머릿속을 파고들어왔다. 차차 익숙해질 것이라는 체념조차 두려운 악취. 그것은 얼굴을 돌리는 것도, 코를 막는 것도 아랑곳 않고 머릿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와 자신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키려했다.
“으엑, 최악이네. 젠장, 죽은 새끼가 발목 잡지 말라고. 너도 왜 발에 걸리적거리는 거냐.”
그 향기를 더해가는 악취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베휜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젠장맞을! 이런 빌어쳐먹을 근성 없는 새끼는 벌써부터 썩기 시작하네.”
성벽 곳곳에 즐비하게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걷어차고, 밟으며 욕설과 함께 그들을 타고 넘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기름기 흐르는 푸석푸석한 금발은 새둥지처럼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 곳곳에 검은 땟물이 딱지처럼 눌어붙어 있는,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한, 비슷한 연배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로렌스 형?”
“오냐, 나다.”
로렌스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내는 자신의 발치에 거치적거리는 또 다른 이의 팔뚝을 짓밟으며 베휜의 바로 옆까지 걸어왔다. 허리띠에 묶여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는 대형 도끼가 카랑카랑 소리를 내며 그의 걸음과 함께 바닥을 튕기고 있었다.
어느 것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딱히 로렌스의 지금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아온 최근의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런 모습이었다. 물론 베휜,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도.
“근데 뭐가?”
“앙? 뭐가라니?”
“뭐가 최악인거야?”
“뭐긴 뭐겠냐? 이 꼬락서니지.”
로렌스는 새삼스레 물어오는 베휜을 향해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베휜의 옆에 주저앉았다.
“확실히 냄새가 지독해.”
“피비린내라면 코가 막힌 지 오래다.”
“그럼 이번 작전? 이번에도 성공했잖아. 그 결과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거고.”
“성공이라? 쓰읍. 뭐, 네가 생각하는 대로 따지자면 확실히 성공이긴 하다만……”
로렌스는 탐탁지 않은 듯 입맛을 다시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베휜이 바라보고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검붉은 하늘 아래, 완연한 어둠이 내리깔리는 그 시간 동안의 암흑만으로는 미처 다 지우지 못할 만큼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는 시체로 가득 찬 평야가 로렌스의 회색 눈을 긁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난. 이런 꼬라지를 바라보면서 작전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전쟁에 익숙하진 않아.”
“……”
“익숙해 지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며 손 사례를 치는 로렌스를 바라보며 베휜은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보다 피비린내에 더 익숙해진 그가 ‘전쟁’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마도 로렌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하루 전투의 축적이 전쟁은 아냐. 적어도 난 그런 생각이 든다. 피비린내는 익숙해질 수 있어도 전쟁은 익숙해질 수 없는 건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이것이 나를, 우리를 위한 전쟁이 아닌 이상, 아마 난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을 테지.”
“……”
“개판인 세상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이렇게 계속 된다면, 이 세상은 곧 지옥이 되어버릴 걸.”
“그럼 우리는 지옥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그래. 베인서트 제국의 이름 아래, 이 대륙을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버러지들이지. 아니, 그 이하인가? 버러지의 아래에 있는 게 뭐더라? 여하튼 그런 빌어먹을 것일 거다, 우리는.”
로렌스는 내뱉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대답하더니 갑자기 무엇이 우스운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거렸다. 쉬어터진 그의 웃음소리가 갈래갈래 찢어지며 베휜의 귓등을 때렸다.
“…….”
자조라도 하는 것일까, 베휜은 체념이라는 말 마저도 빛이 바래버린 것 같은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침묵했다.
“지겹다…… 정말. 이딴 짓도.”
“응?”
그리고 웃음을 그쳤을 때, 로렌스는 허리춤에 메고 있던 도끼를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았다.
“무엇 때문에 내가 여기서 있는지 그 이유는 잘 알고 있어. 그때의 ‘그 일’이 재수가 없었던 거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납득할 수 있어.”
“……”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그 과정에서 무관계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도, 그 사람들이 괴로움을 당해야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납득은 할 수 있어.”
“……”
“그렇지만, 누군가를 죽이면서 무감각해지는 나 자신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게, 저 무게가 내 손에 익숙해져가는 것을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미안.”
한마디, 한마디의 말 속에서 배어나오는 죄책감과, 내동댕이친 도끼를 노려보는 로렌스의 표정에 베휜은 고개를 숙였다. 흐릿한 흉터만이 남아 있을 등에서 마치 그 상처가 생겼을 때에 느꼈던 것과 같은 둔하게 흐르는 통증이 혀끝을 쓰게 했다.
그와 자신이 있어야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
살인에 무감각해지고,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손에 익숙해져가는 이유.
로렌스의 말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지금도 악몽 속에 들러붙어 있는 2년 전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에 무관계의 사람이어야 했던 사람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이유로 베휜의 옆에 지금 앉아있었다.
“정말 미안해, 형. 나, 말을 잘 못하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매번 이렇게 똑같이 말할 뿐이지만…… 미안해, 미안해.”
베휜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미안하다고 말한다 해도, 머리를 숙인다 해도, 마음속의 응어리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진심을 담은 사과 따위로 풀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어린아이의 장난 수준의 것뿐이라는 것은, 다른 아닌 베휜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렇기에. 고개를 숙이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음을. 베휜은 그의 심장이 짓이겨지는 것 같은 느낌만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짜식, 누가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이나 듣겠다고 말한 줄 아냐?”
그럼에도 로렌스는 예전부터 그래왔었던 것처럼, 베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웃을 뿐이었다. 왼손으로. 예전과는 달리 더 이상 오른손으로 쓰다듬지 않았다. 그것은 피비린내가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더 이상 다른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는, 언젠가부터 그의 머릿속에 박히게 된 생각 때문임을 알기에, 베휜은 더욱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게 아냐, 그게. 이제 머리 숙이는 것도 그만해라. 벌써 2년도 더 지난 일이잖아. 내가 화가 나는 건 그런 것 때문이 아냐. 내가 나 자신에게 화가 나는 이유는……, 에……, 그러니까……. 어라? 이런 빌어먹을! 말해놓고 보니 또 뭘 말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네. 아, 씨발! 이래서 멍청한 대가리는 뭘 해도 되는게 없다니까!”
거친 욕설과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로렌스에게 베휜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힘이 들어가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그의 손길이 강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이것이,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는 그의 배려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쨌든, 앞으로는 절대 그 일로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라. 알았냐?”
“응!”
그리고 벌써 몇 번째 했었는지 모를 또 한번의 물음에 베휜은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이 지옥을 잊을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는 이상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되풀이 했다.
그런 두 사람 사이로 문득, 바람이 불어왔다.
“……”
“……”
넓게 펼쳐진 평야 쪽에서 두 사람을 향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실린 역겨운 냄새가 두 사람의 얼굴에서 표정과 대화를 앗아갔다. 두 사람의 눈이 자연스레 그 냄새가 불어온 쪽을 향했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성벽 바로 아래에서부터 시야가 닿는 그 끝까지. 그 모든 곳에 시체가 널려있고, 파괴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아마도 시야가 닿지 않는 더 먼 곳도,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시커먼 웅덩이가 몇 개나 보였다. 그 웅덩이에 처박혀 있는, 기묘한 형태가 되어버린 시체들이 보였다. 그런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들이 앉아 있는 바로 옆에 창끝이 목에 박혀있는 시체가 하늘을 향해 드러누워 있는 모습이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형.”
그리고 그 당연함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한 베휜이 침묵을 밀어냈다.
“앙?”
“형.”
“그래, 듣고 있다. 말 해봐라.”
“우리,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날 때까지'라는 뒷 말을 삼키며 베휜은 그 당연한 경치를 피해 로렌스를 향했다. 입 언저리와 턱 주변을 지저분하게 덮고 있는 수염을 매만지며 로렌스는 베휜이 바라보던 그곳을. 그리고 그가 바라보던 그것보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글쎄……”
“이 전쟁은 언제 끝날까……”
“……글쎄……”
“……”
“글쎄……”
베휜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음에도, 마치 혼잣말하듯 글쎄……라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로렌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물음을 듣고 있지 않은 듯, 그는 몇 번 더 글쎄……라고 중얼거렸다.
“너도, 나도. 그리고 이제는 그 누구도 모를 테지.”
“응……”
고개를 돌려 당연해야 할 그곳을 바라보며 베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스름이 깔리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시체의 파도가 넘실대는 피범벅의 대지, 그것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시커멓게 물들어가고 있는 피범벅의 하늘……
“우리는 과연 뭘까……”
“글쎄다……”
무미건조한 로렌스의 무기력한 대답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랬다. 알 수 없었다. 책을 읽을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로렌스와는 달리 겨우 간단한 글자 정도만 읽을 줄 아는 베휜이지만,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는 것만큼은.
“이제는 누구도 멈출 수 없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서 있었다. 황제라 할지라도, 이제는 자신의 의지로서 멈추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라고, 어떤 기사가 말했었던 것이 그 시간을 넘어 이제야 새삼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